[미술] 페터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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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예술

[미술] 페터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by 호아Hoa 2019. 6. 21.

페터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페터 파울 루벤스는 1577년 독일 베스트팔렌 주의 지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가족들은 1589년 고향인 벨기에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라틴학교를 다니며 그곳에서 고전 미술과 라틴어를 배웁니다. 그것은 나중에 그가 외교관으로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598년 루벤스는 이 도시의 화가 길드에 가입하였고, 안트베르펜에서 맺은 인연으로 1600년 만토바 곤차가 가문의 빈첸초 1세의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의 미술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습니다.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는 그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고대 미술과 미켈란제롤, 라파엘로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빈첸초의 지시로 루벤스는 1603년 스페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1608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가서, 네덜란드의 스페인 총독 알브레히트 대공작과 이사벨라 대공비의 궁정화가가 됩니다. 이 시기 그는 공방을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얀 브뢰겔과 안토니 반 데이크가 협력자로 그와 함께 일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 <십자가를 세움<과 <십자가 강하>를 그렸습니다. 이어 <네 명의 철학자>, <술 취한 헤라클레스>, <레우키포스의 딸들을 납치하는 디오스쿠로이>가 제작되었습니다. 신화적 · 종교적인 인물들 속에서, 고대의 조각 연구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외국의 세력가들도 루벤스에게 주문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1623년 그의 외교 활동이 시작되었고, 이어 세 개의 위대한 연작들도 탄생하게 됩니다. <마리아드 메디치의 생애>, <마리아의 아들이자 정치적인 적수였던 루이 13세를 위한 연작 <콘스탄틴의 역사>, 대공비 이사벨라를 위한 <성체의 승리> 연작 등입니다.

1628년 루벤스는 화가이자 외교관으로서 스페인 펠리페 4세의 궁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벨라스케스를 만나게 되고 왕가의 초상화를 그렸는가 하면, 티치아노의 작품을 모사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화가이자 외교관으로서 영국에 머물렀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카를 1세는 그에게 <화이트홀 궁을 위한 천장화>를 의뢰하는데, 그는 이것을 안트베르펜의 작업실에서 1635년까지 완성했습니다. 그 후 마드리드에 있는 펠리페 4세의 수렵용 별장을 위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한 100점 이상의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1636년에는 추기경이자 국왕인 페르디난드의 궁정화가가 되었습니다. 1640년에는 두 번째 부인의 초상화인 <작은 모피>와 <성자 세실리아>, <성자들과 함께 있는 성모>, 마드리드의 <파리스의 심판>, 그리고 <삼미신>등을 남기고 안트베르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루벤스는 렘브란트와는 대조되는, 북유럽 *바로크 회화의 특징을 보여준 대표적인 화가였습니다. <레우키포스 딸들을 납치하는 디오스쿠로이>는 구성이 뛰어난 루벤스 회화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 바로크

‘불규칙한’이란 뜻의 포르투갈어 ‘barocco'에서 유래.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유럽 전역과 그 식민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 미술의 모든 장르를 포함하는 마지막 양식이다. 바로크의 주요 특징은 힘이 넘치게 움직이는 역동적인 형태와 빛과 음영의 표현을 증대시키는 것 등이다(강한 명암 대비). 바로크의 출발점은 로마였으며, 거기에서 카라바조는 1600년경 마니에리슴에서 벗어난다. 이 양식은 반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처음에 가톨릭 국가들 사이에 퍼졌고, 나중에는 ’안정된‘ 형식으로 신교도 국가들에도 퍼졌다. 단, 시민적인 네덜란드의 미술만은 독립적으로 머물렀다.

 

※ 트렌티노 공의회와 반 종교개혁

가톨릭 교회의 부활과 반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트렌티노 공의회는 1563년, 회화에 관한 몇몇 규정을 의결했다. 루벤스도 그 결정을 따랐다. 이후부터 제단화의 중앙 패널에는 단지 그리스도와 신약의 성자들만이 허락되었다. 그 묘사는 설득력이 있고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한마디로 ‘고도의 양식’이 요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저긍로 문제가 되는 내용과 묘사 형식은 포기해야만 했다.

 

※ 루벤스와 북부 네덜란드

루벤스는 자칭 ‘네덜란드 북부 7주’의 미술을 살펴보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영국과 협상하기 위해서 1628년 북부 네덜란드를 여행한다. 가톨릭적이고 궁정적인 그의 미술과 북부 지방의 프로테스탄트적이고 시민적인 미술 사이에는 공통된 뿌리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고하고, 더 이상 교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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