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에드바르트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 남부의 뢰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지금의 오슬로에 해당하는 크리스니아의 한 변두리 지역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1879년 대학에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가 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1883년에 뭉크는 처음으로, 오슬로의 *분리파 화가들이 한 해 앞서 설립한 ‘가을 살롱전’에 참가합니다. 뭉크는 오슬로의 보헤미안과 무정부주의적이고 사회 개혁적인 예술가들을 접촉했습니다. 뭉크의 최초의 걸작 <병든 아이>는 1886년 가을 살롱전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1889년 이후 뭉크는 국비 장학생으로서 파리, 르아브르와 니차를 여행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인상주의와의 양식적인 유사성들이 사라지며, 잠시 자연주의적인 양상을 보이다가 강한 *상징주의적인 특징을 지닌 ‘선행 표현주의’에 자리를 내줍니다. 이 시기 뭉크는 성적 투쟁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1892년 베를린에서 그의 그림들이 전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시회는 파문을 일으키는 바람에 곧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뭉크는 ‘검은 암퇘지’라는 와인 바에서 만나는 여러 작가들, 그중에서도 스트린드베리와 교류합니다. 1893년에는 <절규>가, 다음해에는 <마돈나>, 그 이후에 <붉은 머루> 등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생명의 프리즈> 작품들이 탄생했습니다.
세기 전환기 무렵에 뭉크는 거의 매년마다 장기적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파리에도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앙데팡당전에 여러 번 전시를 했으며, 이탈리아와 특히 베를린도 여행했습니다. 독일의 수집가들은 그를 주목했고, 많은 초상화 작품들이 생겨났습니다. 툴라라르젠과의 관계가 정신적 쇼크로 끝난 1902년, 뭉크는 <마라의 암살>에 관한 그림들을 작업했습니다. <초록색 방>, <화가와 모델> 등도 그가 여자들과 성생활에 있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또 그는 1907년경에 제작된 세폭화 <목욕하는 남자들> 속에서 미완의 남성다움을 웅장하게 묘사했습니다.
1918년 이후 뭉크는 다시 더 많은 곳을 여행하게 되었고, 베를린과 뮌헨에 있는 아카데미 회원이 됩니다. 1937년에 그의 작품 82점은 ‘퇴폐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독일의 미술관에서 멀어졌습니다. 1940년 이후 그는 은퇴를 하고 1944년에 오슬로 근처의 에켈레이에서 사망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체의 내부를 연구하고 시체를 해부했던 것처럼, 나는 그렇게 영혼을 해부하려고 한다. 당시 시체 해부가 죄악시되었기 때문에, 그는 암호화하여 기술해야만 했다. 오늘날 내가 해부하고자 하는 것은 해부를 거의 비도덕적이고 경박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신적인 현상들이다.” - 에드바르트 뭉크
뭉크의 작품은 현대 회화사에서 독자적인 북유럽의 변화를 묘사합니다. 그것은 ‘정신미술’이라는 개념 하에 미술사의 한 장을 장식합니다. 뭉크는 세기 전환기에 개최된 전시회들을 통해, 특히 베를린에서 결정적으로 *표현주의의 길을 넓힌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 분리파
1900년경 아카데미와 r m밖의 공식적인 예술적 취향에 반대하여 생겨난 진보적인 예술가 동맹
※ 인상주의(Impressionism)
‘인상, 느낌’을 뜻하는 프랑스어 ‘impression'에서 유래. 모네의 1872년 작품 <인상-해돋이>의 제목을 따서 명명되었던 1870년대의 프랑스 미술과 그 이후의 회화 양식.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와 바르비종 화파의 풍경화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을 즉흥적이고 현상적인 형태로 포착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인상주의의 특징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인 플레네르(Plein-air)와 밝은 색채 사용이다. 그리고 벨라스케스와 터너의 지식을 전제로 하여 물체의 윤곽을 용해시키는 회화 방식도 종종 사용되었다. 영국과 독일에서도 인상주의가 수용되었다. 독특한 형색의 점묘 주의 역시 인상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상징주의
1880년경 지나치게 학문화되고 상업화되어 버린 세계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사조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죽음이나 죄악, 질병 등의 주제를 둘러싸고 선회하는 환상이 묘사된다. 뵈클린과 뭉크가 상징주의에 속한다. 유겐트슈틸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 표현주의
드레스덴의 화가 동맹 다리파가 창설되었던 1905년부터 1920년대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예술 사조. 이 개념은 1911년에 베를린의 잡지 《폭풍》의 주간 헤르바르트 발덴이 주도했다. 표현주의는 표현의 증대를 추구하기 위해, 색채를 강하게 대비시키고 형태를 단순화했다. 표현주의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는 고흐와 뭉크이다. 1910년경 *야수파와 *미래주의는 표현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표현주의의 중심지는 키르히너를 포함한 다리파 화가 그룹이 결성된 드레스덴과 베를린, 그리고 특히 칸딘스키와 마르크가 속하는 *청기사파의 활동 거점인 뮌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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