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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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예술

[미술]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by 호아Hoa 2019. 5. 27.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사진 출처 : 네이버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카토에서 태어났습니다. 1889년 마티스는 한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갑니다. 날마다 계속되는 사무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데생 수업을 받게 되며, 겨울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기 위해 그는 1891년 아카데미 쥘리앙 과정을 다닙니다. 그러나 그는 에콜 데 보자르의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는 1892년 ‘진보적인 아카데미 회원’이자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티스는 루브르에 있는 그림들, 특히 푸생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하고 1895년에는 마침내 에콜 데 보자르에 합격합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인상주의 화가들과 그 후계자들과의 교류로 그의 그림은 밝아졌습니다. 1898년 그는 런던에서 터너의 작품을 보게 됩니다. 1899년 그는 세잔과 고갱, 반 고흐의 그림과 로댕의 조각품 하나를 구입하는데, 이후 세잔과 로댕은 그의 인물상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는 한 젊은 화가들 그룹의 우두머리가 되는데, 그들 중에는 두 명의 중요한 ‘야수들’인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드 블라맹크가 속해 있었습니다. 1904년에는 *점묘 주의적이며 *신인상주의적인 화풍의 그림인 <사치, 고요, 관능>이 완성됩니다. <초록 줄무늬가 있는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에서 나타난 색채 대비와 즉흥적인 체색은 1905년에 개최된 살롱 도톤(Salon d'Automne)의 관객들에게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의 그림들을 ‘야수파’의 작품으로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거트루드 스타인의 후원으로 그의 그림에 주문이 폭주했고, 그 결과 그는 1906년에는 알제리로, 1907년에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즈음 <시차 Ⅰ>이 탄생했습니다. 아방가르드 내에서 피카소의 지도권과 관객의 비평에 대해 마티스는 <붉은색의 조화>가 제작된 1908년에, 『화가들의 비망록』이라는 저술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이 시기 마티스는 *입체주의를 단지 ‘공동 주자’의 입장에서만 따랐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1912년의 모로코 여행은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1920년대까지 작품 속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1920년대 말 마티스는 1910년경의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그림 구조를 다시 채택하여 그것을 자신의 ‘과슈 데쿠페(Gouachesdécoupées, 색종이를 잘라서 구성을 확장시키는 기법)로 계속 발전시켰습니다.

마티스는 1941년 종양 제거 수술 후, 비교적 소규모 작품들만을 그리게 됩니다. 또한 그는 1947년에 출간된 『재즈』의 삽화 작업을 했습니다. 그의 만년 작품 중 최대 걸작은 1951년에 완성된 벤스에 있는 로사리오 묵주 예배당의 공동 실내 작업입니다. 마티스는 1954년 니차 근처에서 숨을 거둡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마티스는 20세기 최초의 아방가르드 운동인 *포비슴(야수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미 <붉은 색의 조화>에서 나타나는 극도로 평면적인 회화 공간은 깊은 입체감을 완전히 초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 인상주의(Impressionism)

‘인상, 느낌’을 뜻하는 프랑스어 ‘impression'에서 유래. 모네의 1872년 작품 <인상-해돋이>의 제목을 따서 명명되었던 1870년대의 프랑스 미술과 그 이후의 회화 양식.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와 바르비종 화파의 풍경화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을 즉흥적이고 현상적인 형태로 포착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인상주의의 특징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인 플레네르(Plein-air)와 밝은 색채 사용이다. 그리고 벨라스케스와 터너의 지식을 전제로 하여 물체의 윤곽을 용해시키는 회화 방식도 종종 사용되었다. 영국과 독일에서도 인상주의가 수용되었다. 독특한 형색의 점묘 주의 역시 인상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점묘 주의(Pointillism)

‘점’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Point'에서 유래. 인상주의 참조

 

※ 신인상주의

평면적이면서 장식적인 양식에 대한 명칭으로, 점묘 주의 기법을 바탕으로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은 18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인상주의를 뛰어넘었다.

 

※ 입체주의(Cubism)

포비슴(야수파)의 뒤를 따랐던 현대 미술 사조. 이 명칭은 비평가 루이 보셀이, 1908년 파리의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던 브라크의 그림들은 ‘cubes(입방체)’라고 표현한 데서 유래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세잔과의 접목 속에서 그림의 대상을 기하학적인 입면체와 평면으로 분할하여, 그것을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보이게 한다. 1912년 분석적 입체주의는 종합적 입체주의로 전환된다. 입체주의는 20세기의 회화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포비슴(Fauvism)

‘야수’를 뜻하는 프랑스어 ‘fauves'에서 유래된 20세기 초 프랑스의 미술 사조. 야수파라고도 한다. 모더니즘의 시작에 놓인다. 이 명칭은 1905년 파리의 가을 살롱전에 참가했던 몇몇 화가들에 대한 비평가 루이 보셀의 평론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조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마티스다. 포비슴의 특징은 순수한 색상을 극히 평면적으로 채색하는 데 있다. 입체주의의 등장으로 야수파 화가의 그룹은 와해되기 시작한다. 포비슴은 특히 표현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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