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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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예술

[미술]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by 호아Hoa 2019. 5. 21.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에드워드 호퍼,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에드워드 호퍼는 1882년에 미국 뉴욕 주의 나이액(Nyack)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의 압력으로 1899년에 미술 공부 대신, 뉴욕에 있는 ‘삽화를 위한 대안학교’에서 판화가가 되는 교육을 받습니다. 1900년에 그는 뉴욕 미술학교로 적을 옮기고, 1901년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여 1905년부터 ‘토요 강좌’를 개최합니다. 얼마 뒤 아마추어 화가를 위한 교육 기관을 운영합니다.

광고회사에서 삽화가로서 짧은 경력을 쌓은 후 호퍼는 1906년 10월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에 갑니다. 그는 박물관과 전시회를 통해 사람들과 계속 교류하고 주로 플레네르(Plein-air, 사실적 풍경화)를 그립니다. 또한 아틀리에의 결핍 속에서도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을 열망합니다. 점차 그의 팔레트는 밝아집니다.

호퍼는 1909년경 계속해서 파리에 체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 *포비슴과 *입체주의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의 첫 유럽 여행 끝에 그는 런던, 하를렘, 암스테르담, 베를린, 브뤼셀에 잠시 머무릅니다.

1907년 8월 말에 호퍼는 뉴욕으로 돌아가 다시 삽화가로서 활동합니다. 옛 동창들과 함께 호퍼는 1908년 처음으로 전시회를 갖습니다. 이것은 국립아카데미 위원회의 보수적 취향에 반대하는 작은 저항의 몸짓이었습니다. 1910년에 그는 뉴욕에서 열린 ‘무소속 화가들의 전시회’에도 참가합니다. 2년 후에는 <항해>(그가 몇 년 간에 걸쳐 팔았던 유일한 그림)로 현대 미술의 국제 전시회라고 할 수 있는 전설적인 ‘아머리 쇼’에 참가합니다.

1915년 호퍼는 에칭 기술을 익힙니다. 그 결과 그는 세기말에 화가가 아닌 판화가로서 인정을 받습니다.

1920년 그눈 첫 유화 개인전을 열었지만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24년 두 번째 개인전으로써 이를 변화시킵니다. 호퍼는 실용 판화가와 삽화가로서의 활동을 포기합니다. 그의 미술은 점점 실용적이고 ‘미국적’으로 변합니다.

출처 : 네이버

호퍼는 화가인 그의 아내와 함께 여름을 메인 주나 메사추세츠 주에서 보냈는데, 그곳에 1934년 한 아틀리에 하우스를 짓습니다. 1933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은 호퍼에게 회고전을 열어줍니다. 호퍼의 작품은 도시 그림과 마찬가지로 풍경화가 주도적이었습니다. 1940년경에 대도시 사람들의 그림들 속에서 강조된 상실감은 고독으로 들어섭니다. 1945년에 호퍼는 국립미술관 서신원의 회원으로 선출됩니다. 이후 많은 존경과 명예를 얻게 됩니다. 1953년에 그는 《리얼리티》라는 잡지의 편집위원회에 참여하고, 점점 더 강하게 다른 화가들과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에 대항합니다. 호퍼는 1967년 뉴욕에서 사망했습니다.

출처 : 네이버

 

“<밤샘하는 사람들>은 내가 밤에 거리 한가운데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결코 특별히 고독한 것이 아니다. 그린위치 애비뉴에 있는 두 길이 교차하는 곳에 있는 한 레스토랑. 나는 그 무대를 단순화했고, 레스토랑을 확대시켰다. 아마 나는 의식하지 못한 채 대도시 속의 고독을 그렸던 것 같다.” - 에드워드 호퍼

 

출처 : 네이버

호퍼는 평생 사실주의적인 전통을 고수했고,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에 대항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1960년대에 팝아트와 사진 사실주의의 창립으로 다시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 인상주의(Impressionism)

‘인상, 느낌’을 뜻하는 프랑스어 ‘impression'에서 유래. 모네의 1872년 작품 <인상-해돋이>의 제목을 따서 명명되었던 1870년대의 프랑스 미술과 그 이후의 회화 양식.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와 바르비종 화파의 풍경화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을 즉흥적이고 현상적인 형태로 포착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인상주의의 특징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인 플레네르(Plein-air)와 밝은 색채 사용이다. 그리고 벨라스케스와 터너의 지식을 전제로 하여 물체의 윤곽을 용해시키는 회화 방식도 종종 사용되었다. 영국과 독일에서도 인상주의가 수용되었다. 독특한 형식의 점묘주의 역시 인상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포비슴(Fauvism)

‘야수’를 뜻하는 프랑스어 ‘fauves'에서 유래된 20세기 초 프랑스의 미술 사조. 야수파라고도 한다. 모더니즘의 시작에 놓인다. 이 명칭은 1905년 파리의 가을 살롱전에 참가했던 몇몇 화가들에 대한 비평가 루이 보셀의 평론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조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마티스다. 포비슴의 특징은 순수한 색상을 극히 평면적으로 채색하는 데 있다. 입체주의의 등장으로 야수파 화가의 그룹은 와해되기 시작한다. 포비슴은 특히 표현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 입체주의(Cubism)

포비슴(야수파)의 뒤를 따랐던 현대 미술 사조. 이 명칭은 비평가 루이 보셀이 1908년 파리의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던 브라크의 그림들을 ‘cubes(입방체)’라고 표현한 데서 유래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세잔과의 접목 속에서 그림의 대상을 기하학적인 입면체와 평면으로 분할하여 그것을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보이게 한다. 1912년 분석적 입체주의는 종합적 입체주의로 전환된다. 입체주의는 20세기의 회화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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