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목욕탕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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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목욕탕 역사

by 호아Hoa 2019. 5. 9.

우리나라의 목욕탕 역사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에는 대규모 공중목욕탕 유적이 발견되었고, 로마 시대의 사치스러웠던 목욕 문화는 잘 알려진 바입니다. 목욕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중요한 과제가 되었죠. 오늘은 우리나라의 목욕탕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의 목욕 문화는 불교의 전래와 관련이 깊습니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몸을 청결히 했다는 기록을 많이 찾아볼 수 있죠. 불교 국가였던 신라에서는 목욕으로 몸을 정갈히 하는 것이 중요한 계율이었습니다. 단순히 몸을 씻는 의미를 넘어서 종교적,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신라시대의 목욕탕으로 추정되는 터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기도 했으며, 삼국유사에는 633년에 신라의 재상이 동래 온천에 입욕했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시대 또한 역시 불교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몸을 자주 씻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도경에는 고려 사람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집 안에서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인 정방을 두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또 여름이면 냇가에서 즐겨 몸을 씻었다고 합니다. 신윤복의 그림 단오풍정은 단옷날 목욕을 즐기는 여인들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실이나 민간에서 왜관이나 한국내의 온천지에 온천욕을 다녀오는 일은 자주 있었으며 온양에는 행궁을 설치했을 정도입니다. 1671년 정구가 남긴 봉산욕행록을 보면 당시 동래 온양 온천의 온정원을 찾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당시에도 이미 온양 온천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 잡지 못해 수차례 개축하였으며 이는 1766년 부산 온양 온천에 세운 온정개건비를 통해 확인 할 수 있죠. 임금님도 치료와 휴식을 위해 온천을 즐겼습니다. 온양 온천에 태조와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종, 사도세자 등이 자주 행차했다고 하죠. 이런 목욕 문화는 불교적인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숭유억불을 거쳐 조선 후기에는 나중에 일본식 목욕탕 문화가 들어올 때까지 양반 외에는 자주 씻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절에 목욕시설이 구비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이 자주 다니는 절에서 씻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고려시대까지는 옷을 벗고 씻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알몸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서 목욕옷을 따로 입고 씻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조선 초기 까지만 해도 피부에 좋다며 남아를 복숭아 꽃물에 씻긴 기록이나 쌀겨, 조두 등을 비누처럼 거품을 내어 사용한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수세미로 만든 일종의 목욕용 기구들과 전하는 이름들을 볼 때 어느 정도 목욕을 즐긴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현대의 찜질방과 비슷한 유형인 한증막이 존재했으며, 글과 그림으로 많이 묘사된 탁족이나 신윤복의 단오풍정 등을 볼 때 정형화된 욕탕보다는 개울이나 강가 등 노천에서 씻는 행위를 즐긴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중목욕탕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들어옵니다. 1924년 평양에, 1925년 서울에 처음 문을 열었죠. 일본과 가까워 일본인이 많이 정착한 부산의 경우에는 1909년에 부산 시가지에서 온천이 있는 동래까지 부산전차를 만들어 온천 셔틀로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공중목욕탕을 두고 어찌 남에게 맨몸을 보여주나하고 거부 반응을 보여 인기가 높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1945년 이후 대중목욕탕이 급속히 생겨났고, 2000년대 이후에는 대다수 목욕탕이 찜질방과 겸업을 하고 있습니다. 찜질방을 겸하는 업소라도 대개 목욕탕 시설 안에 찜질을 위한 작은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 대다수입니다. 수영장도 목욕탕과 비슷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니 대중목욕탕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또한 요즘에는 집집마다 목욕 시설을 갖추게 되어 대중목욕탕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죠.

목욕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태리타월은 1960년대 초반에 등장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까끌까끌한 섬유로 된 이 때수건은 부산에서 직물 공장을 하던 김필곤이라는 사람이 비스코스레이온 소재를 꼬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태리타월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 섬유를 만드는 기계가 이탈리아산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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