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이아생트 리고 Hyacinthe Rig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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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예술

[미술] 이아생트 리고 Hyacinthe Rigaud

by 호아Hoa 2019. 6. 16.

이아생트 리고 Hyacinthe Rigaud

사진 출처 : 네이버

이아생트 리고는 1659년 프랑스 남부의 페르피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몽펠리에에서 처음으로 미술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스승은 리고에게서 안토니스 반 데이크의 특성을 지적해 냈다고 합니다. 리옹에서 도제 생활을 계속한 리고는 1681년 파리로 가서 회화와 조각을 위한 왕립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1년 뒤에 그는 로마상을 수여했습니다. 그러나 리고는 상금으로 받은 장학금을 거절하고, 역사화에서 초상화 분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아카데미의 등급상 최상위에 있는 역사화로부터 하위의 초상화로 전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리고는 1684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한 유력한 후보가 되었고,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그리기 1년 전인 1700년에는 아카데미의 주요 일원이 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초상화 분야로 옮긴 리고는 첫 번째 주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은 대부분 신분이 높은 파리의 시민과 관료, 재력가, 예술가 등이었습니다. 1688년 루이 14세의 동생의 초상화를 의뢰받게 되면서, 궁정에서의 그의 화려한 경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1694년에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그리기 이전에 그의 아들의 초상화를 그린 바 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1743년까지 리고는 총 다섯 명의 왕들(루이 14세, 루이 15세, 스웨덴의 카를 12세, 스페인의 펠리페 5세, 폴란드의 아우구스트 3세)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4대에 걸친 프랑스 왕실의 가족을 모델로 세웠습니다. 리고는 처음부터 그의 그림들에 대해 책정된 값을 기록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 기록을 보면 그가 궁정에서의 첫 작업을 마친 후 주문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694년 한 해에만도, 37점의 초상화와 80점의 모사 작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의 3일마다 그림들이 그의 화실을 떠난 꼴입니다. 루이 14세와 필리페 5세의 초상화만 하더라도 무려 열두 점에 이릅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1688년 이후에 리고는 완벽한 공방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림들은 마치 이동식 조립 장치 위에서처럼 생산되었습니다. 고개들은 미리 짜인 몇 가지 유형 가운데 각자의 초상에 맞다고 여겨지는 유형을 선택했습니다. 이때에는 얼굴만 개별적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이 시기에 리고는 풍경화와 전투화, 정물화를 위한 전문가를 고용했습니다. 그들은 배경을 모두 똑같이 그렸고, 얼굴과 손을 제외한 부분을 그리고 나면 리고가 그 안을 채워 넣었습니다. 개별적인 자세와 배경을 그린 초상화는 아주 값이 비쌌기 때문에 드물었습니다. 궁정과 개별적으로 들어오는 주문에서는 이전 방식을 써서는 높은 질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탓인지 상투적인 기법과 비슷비슷한 자세의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리고는 1743년에 파리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 아카데미

플라톤의 학원에 대한 명칭. 이 학원은 영웅신 아카데모스의 신역에 있는 작은 숲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아카데미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학문과 예술 형성의 중심지로 설립되었다. 절대주의 시대에 유럽 전역에서는 1648년 파리에 설립된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의 전형에 따라 아카데미들이 번성했다. 19세기에 이르자 왕립 아카데미들은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그들의 지도 방법은 지나치게 교조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진보적인 미술가들은 그들의 강요된 취향에 반기를 들었다. 곧 사설 교육 기관들이 설립되었는데, 그중에는 파리의 ‘쥘리앙(Julian)’과 ‘쉬스(Suisse)'가 가장 유명하다.

 

※ 르네상스(Renaissance)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어로, 이탈리아어의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조르조 바사리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중세를 극복하고 고대의 예술을 부흥시키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시기는 대략 1420년부터 1600년까지를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1500년까지를(특히 이탈리아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1530년까지를(로마를 중심으로 한) 전성기 르네상스, 그리고 16세기 말까지를 후기 르네상스 또는 마니에리슴으로 구분한다. 르네상스는 새 시대적인 인간상과 이성적인 자연 인식에 바탕을 둔 세계상을 창조했다. 예술가들은 수공업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회화에 있어서 최상의 목표는 수학적으로 계산된 원근법과 해부학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토대로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었다.

 

※ 정물화

정물화는 특히 17세기의 네덜란드 회화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사치품 정물·꽃 정물·과일 정물·박제 정물 등으로 구분되었다. 정물화는 경우에 따라 *바니타스 사상과도 연결되어 있다.

 

※ 바니타스(Vanitas)

‘공허함, 무상함’을 뜻하는 라틴어. 지상의 모든 것이 품고 있는 무상함을 암시로써 표현하는 것. 죽은 자의 두개골과 모래시계, 켜져 있는 촛불 등은 바니타스의 상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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