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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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예술

[미술]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by 호아Hoa 2019. 6. 28.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사진 출처 : 네이버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화가, 소묘 화가, 건축가, 시인이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이탈리아 아레초(Arezzo) 근처 카프레세(Caprese)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미술은 수공업으로 여겨지던 시기였습니다. 1487년 그의 아버지는 마지못해 그를 피렌체의 *프레스코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 밑에서 도제 수업을 받게 합니다. 부오나로티 가는 명망 있는 *메디치 가문과 먼 친척뻘이었는데 1490년경 로렌초일 마니피코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그곳에서 그는 인문주의적인 교육을 받게 됩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 베르톨도 디 조반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장 초기 주문 작품은 도나텔로의 모범을 따른 작은 크기의 부조 <계단의 성모>와, 니콜라 피사노의 모범을 따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입니다.

1496년 그는 로마로 가서 처음으로 웅장한 규모의 고대 조각상들을 보게 됩니다. 좀더 뛰어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소망으로 그는 <바쿠스>를 창조해냈습니다. 또한 곧이어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가 제작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1501년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가서 <다윗>과 그의 최초의 회화 작품으로 여겨지는 <도니의 성모>를 그립니다. 그후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교황의 무덤과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장식하라는 의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천장화는 151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 가족 예배당을 위해 만든 작품 중에는 <산로렌초 교회 도서관의 계단실>이 있습니다. 산 로렌초의 <파사드>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1527년 메디치 가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되었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기회를 포착하여 메디치 역시 추방시켰습니다. 클레멘스는 다시 권력을 잡으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방어 시설을 개축했습니다. 이 도시는 열 달 동안 황제군과 연합한 교황 군대의 공격에 저항했습니다. 1530년 8월 공화제의 간막극이 막을 내렸습니다.

1530년대 초 로마에 다시 정주한 미켈란젤로는 1535년 새로운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주문받습니다. 그리고 1546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반구형 천장을 설계하고,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진행되었던 건축물을 위한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는 1564년 로마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미켈란젤로는 일차적으로 뛰어난 조각가로 인정되지만, 회화와 그 밖의 건축 분야에서도 훌륭한 작품들을 창조해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즁요한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 프레스코(fresco)

‘신선한’ 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fresco'에서 유래. 벽화 기법으로 아직 축축한 회벽 위에 색을 칠하게 된다.

 

※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15~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이 높았던 시민 가문이며 공화국의 실제적인 통치자였다.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여 르네상스 시대가 피렌체에서 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349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베드로 성인의 묘지 위에 세워졌고 실베스트로 교황이 396년에 대성전으로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은 이민족의 잦은 약탈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그때마다 보수작업이 뒤따르긴 했으나 원래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마침내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성전의 재건축 계획을 세우도록 하여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 사업이 시작되었다. 브라만테는 로마에서 가장 역사성이 깊은 판테온의 돔 형태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도중에 몇 차례의 변형이 있었으나 브라만테의 설계는 막판에 건축 책임자였던 미켈란젤로에 의해 다시금 채택됨으로써 오늘에 이르도록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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