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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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예술

[미술]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by 호아Hoa 2019. 5. 29.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사진 출처 : 네이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습니다. 빈의 미술 공예학교에서 몇 년 동안 수업을 받은 후, 그와 형 에른스트 그리고 동창생 한 명은 1879년에 화가 주식회사를 창설했습니다. 그 모임의 공식적인 목표는 어떠한 개별적인 양식도 만들지 않는 것(빈의 링슈트라세에 있는 새 건축물 작업에 동원되기 위한 이상적인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그 회사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들은 1888년 부르크 테아터에서의 그들의 장식적인 미술에 대해 황제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1890년에는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에서의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1897년 클림트는 빈의 *분리파 창립 멤버에 소속이 되었으며 그 대표가 되었습니다. 뵈클린과 같은 외부 화가들도 참여했던 이 그룹의 1898년 첫 전시회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클림트는 분리파의 전설적인 *유겐트슈틸 잡지인 《베르 사크룸》을 위해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1900년경에 그린 <철학부>와 <의학부>의 그림들은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외설 혐의에 휘말려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그는 곧 *상징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비어즐리의 인물 형성과 ‘비잔틴적인 것’은 그의 양식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디트 Ⅰ>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1902년 클림트는 벽화 <베토벤 프리즈>를 기증했습니다. 1903년에는 이탈리아의 라벤나로 여행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초기 기독교적인 모자이크화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의 대표적인 ‘금빛 양식’에 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1905년 다툼이 벌어지면서 클림트를 둘러싼 ‘양식화가’들은 빈의 분리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 이미 풍경화를 정사각형의 크기로 그렸던 클림트는 이제 초상화에서도 그 ‘긴장 관계가 없는’ 정사각형 크기를 이어갔습니다. 이무렵 그는 에곤 실레를 알게 되었습니다. 1908년 중반 <입맞춤>을 비롯한 클림트의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에서 ‘클림트 그룹’은 미술박람회를 열었습니다. 1909년에는 실례도 참가했습니다.

그 후 클림트의 황금 시대는 그 막바지에 다다르고, 그것은 오스트리아의 *아방가르드에 의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삶과 죽음>과 <처녀>는 그의 마지막 우의화입니다. 클림트의 후기 작품으로는 그의 주 수입원이었던 초상화와 풍경화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의뢰인은 빈의 중상류 시민계층의 여자들이었습니다. 1917년까지 뮌헨과 빈에서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불렸던 클림트는 1918년에 빈에서 사망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클림트는 유겐트슈틸의 지도적인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1897년 빈의 분리파 창립 멤버였으며 초대 대표였습니다. 그의 반 여성 해방적인 시선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요부의 묘사와 여성의 성적 특징을 묘사한 작품들로 인해, 그는 20세기 에로틱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 분리파

1900년경 아카데미와 그 밖의 공식적인 예술적 취향에 반대하여 생겨난 진보적인 예술가 동맹

 

※ 유겐트슈틸

1900년경 회화, 조형 예술, 공예에 해당하는 양식적 현상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1896년 뮌헨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잡지 《유겐트(Die Jugend)》에서 그 이름이 명명되었다. 독일의 유겐트슈틸에 상응하는 양식으로는, 프랑스의 아르 누보, 영국의 모던 스타일, 오스트리아의 분리파가 있다. 유겐트슈틸의 특징으로는 평면성과 유연하고 장식적인 선 처리를 들 수 있다. 유겐트슈틸의 기반이 되었던 것은 라파엘로 전파였다. 클림트와 뭉크, 호들러의 작품 속에는 유겐트슈틸로부터 상징주의로의 전환이 나타난다.

 

※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 선두’를 뜻하는 프랑스어. 19세기 말부터 예술에 전용되어 새로운 예술적 전개를 위한 개척자 또는 예술 경향을 뜻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 상징주의

1880년경 지나치게 학문화되고 상업화되어 버린 세계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사조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죽음이나 죄악, 질병 등의 주제를 둘러싸고 선회하는 환상이 묘사된다. 뵈클린과 뭉크가 상징주의에 속한다. 유겐트슈틸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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