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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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예술

[미술]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by 호아Hoa 2019. 6. 4.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사진 출처 : 네이버

장 프랑수아 밀레는 1814년에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일찍이 소묘에 재능을 보였던 그를 1833년 셰르부르의 한 화가 밑에 도제로 보냈습니다. 시 장학금을 받은 밀레는 1837년 파리의 미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840년 그는 처음으로 살롱전에 참가했습니다. 밀레는 1838년 이래로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고, 스페인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가족 초상화들을 그렸습니다. 밀레는 신 *로코코 양식으로 그린 연애 장면들과 인물화를 통해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1847년 그는 테오도르 루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친구를 거쳐서, 나중에 모네와 그 밖의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도 후원하게 되는 중요한 미술상 뒤랑 뤼엘에게 그림들을 처분했습니다. 1848년의 혁명 이후 밀레는 공화제 정부로부터 역사화 한 점을 주문받았습니다. 그는 주문된 그림 대신 시골 농부를 주제로 한 <농부들의 휴식>을 제공했습니다. 1849년 밀레는 콜레라를 피해 바르비종으로 가는데, 그곳은 앞으로 그가 살면서 자신의 소재들을 발견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1850년경 살롱전에서 전시되었던 <씨 뿌리는 사람>은 진보적인 비평과 보수적인 비평 모두의 고려 대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룻과 보아스>로 불렸던 <수확하는 농부들의 식사 시간>으로, 밀레는 1853년 최초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1850년대 중반부터 밀레는 혁명가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그림들이 지닌 주제 때문이 아니라, 그 주제의 변형 때문이었습니다. 1857년 그는 <이삭 줍는 여인들>을 완성했습니다. 이 그림은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습니다. 한편 미국에서 의뢰한 <만종>이 제작되는데, 이 작품은 이후 5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자주 복제되는 그림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에 경탄했습니다. 1863년에 그린 <괭이 가진 남자>는 보수파들의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지만, 밀레가 ‘비정치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서서히 그 작품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순수한 풍경화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1863년 이전의 작품 속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던 요소들이 *바르비종 화파를 거쳐 *인상주의로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1860년대 후반에 생겨난 그림들 속에는 밀레의 일본 판화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67년 국제 전시회에서 밀레는 호평을 얻게 되고, 다음 해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는 1875년 바르비종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밀레는 들라크루아의 영웅적 *낭만주의나 앵그르로 대표되는 *아카데미즘으로부터 아무것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박한 소재인 ‘페이자즈 앵팀(Paysage Intime, 내적인 풍경화)’을 바르비종에서 발견했습니다. 미화나 과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밀레는 *사실주의에 속합니다. 밀레의 바르비종 화파는 인상주의를 위한 본질적인 전제들을 창출해 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로코코(Rococo)

‘조개 모양 장식품’을 뜻하는 프랑스어 ‘rocaille'에서 유래. 17세기의 바로크 미술과 대략 1720년부터 1780년까지의 고전주의 사이에 유행한 유럽의 미술 양식. 로코코는 장식 양식으로서, 바로크의 장중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프랑스에서 생겨났다. 여기서 빈번히 사용되는 소재는 조개 모양과 곡선 무늬 등이다. 신화나 사생활 영역에서 나온 경박하고 외설스런 주제들은 로코코 미술의 전형이다.

 

※ 바르비종 화파

1830년 이후 파리의 화가들은 퐁텐블로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르비종에서 여름을 보내기 시작했다. 카미유 코로와 테오도르 루소를 포함한 몇몇 화가들은 그곳에서 더 오랫동안 머물렀다. 밀레는 1849년 바르비종으로 완전히 이주했다. 바르비종 화가들의 공통점은 전에는 비예술적으로 간주되었던 시골적이고 농가적인 소재들을 취했다는 점과 ‘플레네르(Plein-air)', 즉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 인상주의(Impressionism)

‘인상, 느낌’을 뜻하는 프랑스어 ‘impression'에서 유래. 모네의 1872년 작품 <인상-해돋이>의 제목을 따서 명명되었던 1870년대의 프랑스 미술과 그 이후의 회화 양식.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와 바르비종 화파의 풍경화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을 즉흥적이고 현상적인 형태로 포착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인상주의의 특징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인 플레네르(Plein-air)와 밝은 색채 사용이다. 그리고 벨라스케스와 터너의 지식을 전제로 하여 물체의 윤곽을 용해시키는 회화 방식도 종종 사용되었다. 영국과 독일에서도 인상주의가 수용되었다. 독특한 형색의 점묘 주의 역시 인상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Romanticism)

18세기 말경에 탄생하여 대략 1830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성행했던 고전주의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처음에는 문학에서, 나중에는 미술과 음악 분야에서 전개되었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이성이나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감정과 비합리성을 중요시한다. 낭만주의는 중세를 재발견하였으며, 특히 독일에서는 이것을 ‘좋았던 옛 시절’로 이상화시켰다. 낭만주의 미술에서, 특히 프리드리히와 터너에게 있어서 풍경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 아카데미

플라톤의 학원에 대한 명칭. 이 학원은 영웅신 아카데모스의 신역에 있는 작은 숲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아카데미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학문과 예술 형성의 중심지로 설립되었다. 절대주의 시대에 유럽 전역에서는 1648년 파리에 설립된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의 전형에 따라 아카데미들이 번성했다. 19세기에 이르자 왕립 아카데미들은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그들의 지도 방법은 지나치게 교조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진보적인 미술가들은 그들의 강요된 취향에 반기를 들었다. 곧 사설 교육 기관들이 설립되었는데, 그중에는 파리의 ‘쥘리앙(Julian)’과 ‘쉬스(Suisse)'가 가장 유명하다.

 

※ 사실주의(Realism)

넓은 의미로는 양식과 상관없이 현실에 충실한 묘사를 일컫는 명칭이다. 좁은 의미로는 19세기 중반경 프랑스에 등장했던, 밀레와 쿠르베의 사회 비판적인 미술 사조와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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